山上4호 장재광선교사 (관리자 2012.01.20)
제4호
2011년 12월
『山上』(야마노우에)는 일본국효고현의 타카라즈카市에 있는 야마노우에교회 에서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선교와 기독교신앙소책자입니다

내용
하나. 단편설교-때가 찼다
둘. 일본이야기(1)-일본인과 조상숭배
셋. 일본이야기(2)-일본교회의 박해와 순교역사 넷. 선교단상-짧고 긴 1년
하나. 단편설교
때가 찼다
막 1:14-15
본문은 단 두 구절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 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렇게 짧은 본문은 마가가 기록한 복음서의 서술 방식의 특징인 간단명료한 형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짧은 본문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든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한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잡히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지 않으셨 습니다. 예수님에 의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는 요한이 잡힌 후 시작됩니다. 요한이 “잡혔다”는 말은 감옥으로 넘겨졌다는 의미로도 이해 됩니다. 그래서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통해서 지금까지 요한이 하였던 행동을 조직적인 힘에 의해서 할 수 없도록 조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잡혔다”는 말은 당시 정치적, 종 교적 세력들에 의한 세례 요한의 사역이 종식되었다는 것으로 전해 들을 수 있으나, 이것은 당시 유대 지역에서 일어났던 그런 사건의 정황에 대한 서술이 아닙니다. 단순한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는 것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을 알리려는 역사의 분기점과도 같은 서술이라고 생각됩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것입 니다.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주며,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오실 예수님을 전하는 요한의 사역은 예수 님이 오심으로 마감이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의 사역을 펼쳐나가는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일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생애 사역을 일으키실 신호였습니다. 이점에서 마가는 “요한이 잡힌 후”라는 말로써, 구약 사역과 신약 사역의 전환점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직임을 수행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즉 오신 메시아 에 의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위해서 오셨고, 이 세상에 근본적 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은 그냥 단순히 기 쁜 소식으로서 복음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말에서 복음보다는 “하나님의”라는 말에 강조점 을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바울서신에서 (고린도전서 15장 1절 등)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라는 말로서 복음 전파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주체로서 강조를 하지만, 그 복음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고, 누가가 전한 복음이지만 바울의 복 음, 누가의 복음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현실과 목회와 선교사역에서 복음을 이해 할 때나 전할 때에 “내가 복음”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누가복음도 아니고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뜻과 상관없는 자기 이해 로 복음을 전하거나, 아니면 내가 원하는 식으로 복음을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기도의 내용에서 많이 보게 되는 현실입니다. 비기독교적 인 기복적 기원이 그 대표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복음은 분명 우리에 게 구원을 가져 다 줍니다. 하지만 그 구원은 엄밀히 말하면 내 구 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그구원을 계획하고 행하시고 효력을 발생시키는 분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그분 자신의 나라를 세우시는 데 있어 서 스스로 일하시는 방식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복음의 은혜를 받고 누리는 우리의 중심으로 이 해하기보다는 복음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의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 다. 하나님의 복음을 하나님이 주체자라는 의미에의 “하나님의”라는 데 중심을 둘 때, 그 때 비로소 믿는 자가 지켜야 하는 율법이 조건 이 아닌 은혜로 다가오며, 그 계명들이 우리의 의무 이전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임을 진정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 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감사함으로 율법을 지켜 나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복음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을 본문 안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들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가 찼다”, “하 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모두가 복 음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과거에 구 약의 선지자들로 하여금 주의 백성들에게 약속 하셨던 하나님의 그 약속이 현재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 니다. “때”는 구약의 약속을 성취할 때입니다. 이 때는 메시아의 등 장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결정적인 방법으로서 실행할 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로서, 왕으로서 오셔서 통치 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이 때는 복음의 결정적인 때요,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적인 때인 것입니다.
이러한 종말의 때에, 복음의 결정적인 때에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말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가까이 왔다”는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과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나 라는 통상, 통치권이라고 할 수 있는 주권(王)과 백성(民)과 통치 영 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영토(土)로 이루어집니다. 이 3가지 중에 가장 비중이 있는 요소는 통치권입니다. 민주주의 나라는 주권이 “民”(국 민)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민권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나 라는 주(主)권주의입니다. 주권이 “主”(하나님)께 있습니다(출15:18). 주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우리가 사는 세상 안으로 들어 왔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온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서 그 분의 나라가 이미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는 것 은 예수님 자신이 앞으로 행할 사역이 구약에서 나타내셨던 하나님 의 자기계시와 연결된 하나님의 일(work)이고, 하나님의 통치 안에 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 사역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이러한 말씀과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명실공이 하나님 자신이 진행하는 구속역 사 속에서 파노라마 같이 펼쳐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기 나라를 실현시켜가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는 일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하 나님의 규율을 깨뜨리며, 하나님께 향한 단절과 반항의 와중에 있는 타락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결정적으로 돌려 세울 수 있 는 때가 이 때이고, 이 때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 나라의 실체를 현저하게 조성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천상의 하늘의 장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 니라 인간의 구속을 확보하셔서 그분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인간세상 속에 찾아오시고, 인류역사 속에 침투해 오셔서 이 세상에서도 그 나라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나 라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통해서 그분의 주권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하나님 의 권세)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가까이 온 것입니다.
이러한 “때가 찼다”는 이 ‘때’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 라에 들어가기 위한 결단의 자리에로 초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 신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들어갑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키워드입니다. 예수님은 기독교 신앙인가 아니면 불신앙인가하는 것을 판정 하는 결정적인 주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을 만나 야 합니다. 곧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취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내용을 설명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 사람들은 초대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 심, 그것이 인간의 시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마지막 때의 마지막 말씀이며, 최고의 선물이며 또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결정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복음의 결정체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복하든지 아니면, 세상이라는 주를 따라가든지 그 선택은 자유입니다. 이 결단은 막중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복하지 않는 그 결과는 예수님이 책임 질 수 없습니다.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날이 옵니다. 그것은 영원 한 사망입니다. 이 때문에 이 시대에 사람들의 회개의 결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때가 찬” 세대에 나타난 복음 앞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회개하고 그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인간은 마땅히 회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의무와 같습니다. 복음 앞에서 사람이 우선 해야 할 일은 복음은 믿는 것이지만 그 믿음의 행위에는 반드시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라는 시간의 벽을 깨뜨리고 이 세상에 들어 설 때에 그 나라 안에서 함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늘 나라의 잔칫상을 바라보기 전에 자신을 되돌아 보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때가 차서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주는 그 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하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에게 두었습니다(마16:16-19). 교회를 그의 몸으로 세 우신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시고, 천국으로 가는 복음 전파의 임무를 두었습니다. “때”가 찬 이 세대에 교회의 일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교회가 여러 가지 일 중에서 우선적으로 택하는 일이 아니라 교회의 일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교회는 마땅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돌봄이 목회적(구원적)이어야 하고 교회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자선단체나 봉사단체가 됩니다. 교회는 고아원이 아 닙니다. 교회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착하게 살도록 권면하는 안내자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사망의 길로 가는 생명을 건져내는 구원자의 도구입니다. 그 방법은 유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이 예수님인 것을 전해야 합니다. 즉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람들 에게 주님 앞에 세워두어야 합니다.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때 인간이 인간의 비참함을 희미하게나마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자신이 초라해야 눈물이 생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이신 그 하나님이 천국 가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 복음 앞에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다해야 합니다.
둘. 일본이야기 (1)
일본인과 조상숭배
일본인에게 있어서 조상숭배는 우리민족이 조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감정과 다르다. 이들의 조상숭배는 일본인의 기성종교로부터 비롯된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조상숭배에는 종교적 우주론이 깔려 있다. 일본인들은 일 년 중에 특정한 절기, 예를 들 어 춘분이나 추분 전후의 3일간을 합친 7일 동안을 피안이라고 하는데 이 기간에 절을 찾거나 자기 집 안에 만들어 놓은 불단(조상신 의 제단)에 손을 합쳐서 절을 한다. 봉(오봉)이라하여 음력7월 15일 에 조상의 영혼을 두고 제사 지내는 불교적 행사 날에도 마찬가지 로 참배한다.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의 중심에는 일본인의 조상숭배 사상이 배여 있습니다. 1983년 실시한 NHK 방송의 <일본인 종교의식조사>에 의하면 <선조의 사람들과 깊은 마음에 유대를 느낍니까?>라는 질문 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59%에 이르고 있다 고 전했다. 성묘에 대해서는 89%의 사람이 이것을 습관으로서 실시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또한 집에 불단이 있어서 <불단을 숭배한 다>는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 일본인의 전체에서 57%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 조사되었다. 반면에 동일한 조사에서 특정한 종교가 아 리도 어떤 종교이든지 신앙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33%였다.
이러한 조사의 결과는 일본이 특정한 종교를 갖고 있든지 아니든 지 그들의 조상숭배와 토착종교는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해 준다.
한마디로 일본인의 종교관은 조상숭배 사상과 연결되어 있고, 조상숭배는 토착화된 종교의 토대 위에서 행사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상숭배의 종교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조상숭배를 떠받치고 있는 일본인의 종교관은 우주 론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데 그 우주론의 중심은 영혼관이다. 예부터 일본인은 각 사람마다 하나의 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살아있는 인간의 혼은 ‘살아있는 영혼’ 또는 ‘생령’이라고 불려진다. 그것에 대해서 죽은 인간의 영혼은 사령 곧 ‘죽은 자의 영’이라고 부르고 매우 난폭한 영적 위엄을 소유한다고 보았다. 그 죽은 영혼 은 살아있는 인간이 구체적으로는 죽은 인간의 자손들이 의례를 반 복적으로 행하는 것에 의해서, 차제에 영혼의 위력도 진압되고 더구나 죽은 영혼의 격을 높여 간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유교적 도덕의 영향이기도 하고 이러한 조상 숭배를 통해서 의례하는 자의 덕을 높인다고 하는 의미도 갖고 있어서 집마다 집안에 불단을 만들어 놓고 매일 인사하듯이 참배한다.
죽은 영혼으로 있는 영혼이 격을 높이고 드디어 사자 곧 죽은 자로부터 신이 되어 간다. 다시 말해서 근친자 즉 가깝게 지내는 자 등에 의한 의례라는 행위가 조상의 영이라고 하는 신(神)을 만들어 낸다. 이 조상의 영은 선조라고도 부르고 그 집이나 일족에 풍요나 행복 을 가져 다 준다고 믿고 있다.
죽은 자 의례에는 탈상이후에 보통 1년 주기, 3년 주기, 7년 주기,
13년 주기 등의 년기 법요가 있다. 그리고 죽은 후 33년째 (지방에 따라 50년째라는 곳도 있다)의 33주기로 조의를 행사한다. 이렇게 해서 죽은 영을 조상의 영에 승격시키는 것으로 생각하여 참배하고 제의를 지낸다. 이러한 행사는 대도시보다는 지방일수록 심하다. 이 최종 년도 주기 때에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불단에 바치고 있는
위패를 소각해 버리거나, 묘의 가운데나 그것을 두거나, 절에 바치 거나 한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죽은 사람은 10만억 땅 만큼이나 되 는 다른 극락정토에 가 있다고 가르침을 받아서 죽은 조상의 영을 절에 두지만, 조상의 영은 자신의 고향근처에 있다는 생각으로 오봉 이나 정월에는 자손이 있는 집에 그 영이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그 리고 그 영은 언젠가 다시 인간으로서 변하여 태어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영혼의 순환사상에서 비롯된 생각인데 이것이 일본인의 조상 숭배에는 불교적 영혼사상이 깔려 있다는 증 거이다.
이렇게 해서 죽은 영이 조상의 영이 되어 가는 과정은 갓 태어난 아기가 성장해가는 과정과 유비해서 이해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죽은 영은 태어나면 곧 <계명>이라고 하는 죽은 영의 이름을 붙어 주는 일이 있고, 갓난아기도 곧 이름이 주어진다. 탄생 후 1개월간 은 양자 모두 불안정한 상태이고 일종의 부정한 때라고 생각한다.
1개월 정도 지나면 양자 (죽은 자의 영과 아기)는 함께 정화되어가 는 상태에 들어가고, 드디어 정해진 의례로서 행하는 년기법요 또는 753의례(7살(나나)-5살(고)-3살(상)이라는 숫자에 맞추어 행사하는 일)을 통해서 성장해 간다. 조상은 32회기에 행해지고 이 무렵 태어난 아기도 장성한 어른으로 성장하고 결혼해서 새로운 집을 만든다.
이상과 같이 조상의 영혼화 하는 과정인 조령화와 갓난아이의 성장 화 과정의 사이에는 강한 유비가 있고, 인생을 하나의 순환과정으로 서 보는 “삶과 죽음 그리고 다시 삶” 이라고 하는 상태로 영혼의 순환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연히 죽음과 환생이라 고 말한 인류사의 먼 초기부터 표현 되어진 종교의식이과 같은 것이 다. 다만 이러한 종교 우주론적 신앙을 현세에서 제사 의식으로 구체화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셋. 일본이야기 (2)
일본교회의 박해와 순교역사
일본의 교회박해 역사를 말하려면 1517년 종교개혁까지 올라가야 한다. 종교개혁이후 카톨릭교회내에서 카톨릭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이그나지올라가 예수회 운동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그 는 예수회운동이 유럽에서 힘들다고 판단하고 프랑스시코 샤빌레라 고 하는 청년을 통하여 일본에 전해지게 된 것이 일본의 카톨릭 전래이다. 샤빌레는 가고시마 옆에 다데가시마, 규수, 교또 등을 다니며 전도를 했다.
1567년에 나가사키에 기독교가 전해졌다. 그곳에 여러 교회가 세워 졌고 루이스 알메이다신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곳에 신사와 절이 세워져 있다. 박해의 결과이다. 1580년에 오무라라는 지역에 기독 교가 영향을 준 때가 있었다. 오무라는 지역을 지배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오무라는 다스렸던 영주인 대명(大明)은 유럽문화를 깊이 알고 서양문화를 습득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최초의 크리스챤이었다고 생각한다. 대명은 나가사키를 예수의 영토로 기부했다. 기독교박해 시 기독교를 버렸고 후에 예수의 땅이라고 기부한 것으로 인하여 일본인의 반발이 일어났다. 1587년에 도요코토미헤 데요시는 하카타(지금의 규수)에 와서 교회가 많이 세워져 있음을 보고 놀란 후 정치 권력자로서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반천령’이라 는 기독교 추방령을 내렸다. 1597년에 26명의 기독교교인을 교또에 서 잡아서 나가사키까지 걷게 하였고 나가사키에서 이들을 처형하였다. 이 중에는 유도리이바리라는 13세 소년도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하여 기독교인이 더 증가 하였고 그 후로 나가사키(무라까미)를 일본의 로마라고 불리게 되었다.
1614년에 두꾸가와이에야스는 더 철저하게 기독교를 박해 하였다.
26명을 죽인 자리에서 기독교인 55명을 죽였다(1622년). 이 때는 기독교인을 숨겨 주는 자도 죽였다. ‘후미에(踏絵)’라는 팻말을 만들 어 박해했는데 ‘후미에’그리스도의 형상을 조각한 나무다. 기독교인 들에게 후미에를 밞고 지나가게 했다. ‘후미에후마사세루’말은 뒤에 기독교를 박해하는 말의 대표적인 상징 언어가 되었다. 1636년 종 교를 전파하지 않는 조건으로 네덜란드의 사람만 교역을 허용하였 고 이것을 허용한 지역이 나가사키의 데지마였다.
1637년에 시마하라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더 심해졌다. 시마하라의 난은 1637-38년에 발생 했는데 과중한 세금과 농작 물 착취에 대하여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주동자는 16 세 나마구사시로였다. 이 때에 에도 막부는 농민의 난이 전국적으로 퍼질 것을 염려하여 이 난을 그리스도의 난으로 규정하고 기독교인 들을 3만7천명을 잡아 하라쥬구에서 죽였다(1637년). 이렇게 1600-1865년까지 260년간 기독교를 박해했다. 박해 기간 가운데 특히 제도적으로 박해를 하기 위해서 ‘5인조제도’를 만들었다. 5인 조제도는 5명을 한 그룹으로 정하여서 그 가운데 1명이라도 기독교 인이 있으면 나머지 4명도 함께 죽이는 제도이다. ‘踏絵(후미에)’제 도를 만들었고(1626년), 이 시대에 일본의 모든 사람은 반드시 어느 절에 소속(등록)이 되도록 한 제도를 만들었다 그것이 소위 단가제도(檀家制度)라고 ‘슈우몬아라타메(宗門改め)’이다. ‘슈우몬아라타메(宗門改め’)라고 하는 것은 에도(江戶)시대에 기독교를 금지하기 위 하여 바쿠부(幕府)라고 하는 무가(武家) 정권의 수장격인 쇼우군(將 軍)에 의해 모든 집집마다 개인마다 절에 소속된 불교 신자인 것을 증명하는 신앙조사를 말하는데 이런 제도를 통하여 철저하게 기독교를 박해하고 기독교인들을 말살하려는 시도를 행하였다. 이러한 박해 260년간의 기간은 기독교를 금하는 금교시대(禁敎時代)였다.
그 후에 1859년에 기독교선교사가 다시 들어왔고, 1865년까지 외국 인 거주지에 카톨릭 성당이 세워졌다. 이 때에 무라까미 마을에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숨어서 기독교 신앙을 지킨 이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무라까미 마을 사람 대부분이었다. 이 사실이 일본 전국에 알려지면서 1867년에 무라까미에 4번째 박해가 시작되자 많은 사람 들이 절에 들어갔고 그 절 안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켰다. 1868년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때에도 기독교에 대한 금교령은 계속 되었다.
3,393명을 선발하여 전국에 있는 기독교인을 박해하려고 전국 곳곳 에 파송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기독교 박해도 있었지만 일본의 전파가 더딘 몇 가 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외국과의 싸움이었다. 외국과의 싸움을 통 하여 기독교의 평등 사상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어 권력자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또 하나는 좋은 도덕 관념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종교로부터의 미움도 기독교의 전파를 힘들게 했다. 이 같은 외부의 영향도 있고 또 당시 수도회의 이권 다툼과 같은 기독교 안에서의 문제도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외국 종교라는 전통으로 내려오는 사람들 사이의 인식도 기독교 전파의 걸림돌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아메리카인이 된다는 생각을 의연 중에 가지고 있다. 가족의 행사가 주일(일요일)에 행해지는 관계로 가족 중에 기독교인은 주일 에 예배에 참석하느라 가족 행사에 빠지게 되면 가족들은 그 기독 교인을 ‘우리가족’이 아니라고 말하고 가족의 울타리를 가지고 암묵 적인 압력을 가한다. 기독교를 믿는 것은 좋은데 세례를 받는 것은 안 된다고 한다. 세례를 받으면 기독교인이 유골이 있는 불교 사찰에 가지 않을 것을 알기에 조상의 山所(무덤)문제는 어떻게 되겠냐고 묻는다. 이와 같이 금교령의 영향으로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신후미에(新踏絵)’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 본 기독교박해역사 안에서 생명을 다하여 기독교 믿음을 지키려고 생명을 다했던 일본 그리스도인 선조들의 박해의 고통을 헤아리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한다.
넷. 선교단상
짧고도 긴 1년
지난 11월 24일이 우리가 일본 땅에서 현장 선교 사역을 시작한 지 일 년이 되는 날이다. 한 살 배기 선교사역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를 자문해 보면 단 한마디 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한 마디이다. 하나님께서 오사카와 고베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도시에, 그것도 사람이 붐비는 도시 한 가운데도 아니고 하루에 버스도 한 시간에 두 대(출근 시간에는 3대)밖에 안 다니는 시의 변두리에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분명 하나님의 시작이었다. 그 지역도 사람들이 평범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곳도 아닌,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듯 높은 곳에서, 교회의 건물도 아닌 집에서 선교와 교회 사역을 시작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일하심일 것이다. 올 여름 한 국에서 선교팀이 다녀가기 전까지 우리 부부 둘이서 마주보고 예배 드리며 지나 온 6개월의 시간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한 시간이었다. 60, 70대 어르신들이 대부분 사는 한적한 마을에 우리가 선 교사로 온 것은 분명 하나님의 계획이었기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굳게 닫힌 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 왔다.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한국 음식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이 모이는 마을모임에 자리를 같이 하기도 하며, 매주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매달 한국요리를 가르쳐 주기도하면서 그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만들어 선교사인 우리가 그들 속에 있다는 사실을 생활 가운데 각인시켜 왔다.
일 년 중에 반은 그렇게 지났고, 여름이 지난 후 60대의 한 여성이 교회에 처음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한 평생에 절에 왔다 갔다 하면 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교회에 나온 이후 성실하게 기독교 신앙을 배워 나가고 이다. 첫 신자 이후 3개월이 되었을 때 50대 되는 또 한 여성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매주 예배에 착실 하게 참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나가고 있다. 부부로 시작했던 이곳에서의 예배가 한 해 동안 배가 되었다. 이 모든 한 해의 모양은 야마노우에교회가 있는 이 지역에서의 하나님의 걸음걸이의 자 국들이다. 곧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지나 온 한 해이다. 앞으로도 여 전히 선교의 변방인 이 일본에서의 ‘선교’라는 고상한 이유 때문에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선교로 와있는 우리들에게는 고국에서 맞이했던 명절과 그런 특별 한 날이 없다. 우선 이곳 달력에서 그렇고 우리 마음에서도 그렇다. 우리의 마음의 캘런더에는 모든 날이 특별한 날이다. 우리의 일상이 복음을 전하는 날들이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날에 아주 특별한 날 이 있다. 복음을 듣고 어느 누가 교회에 나오는 날이 그렇다. 올 한 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 두 번의 특별한 날을 주셨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오는 해도 하나님의 그 일하심을 기대해 본 다. 이 땅 선교에 대한 우리의 열정과 열심보다도 언제나 일본 사람을 향한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의 그 열심으로 우리의 선교가 되어져 가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사회적 문화 행사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크리스마스가 주님이 오심을 맞이하는 진정한 신앙 (信仰節)로서의 성탄절이 되는 날이 오기를...
선교,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들이 사는 그 땅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며, 그들을 위해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이며, 그들이 묻히는 그 땅에 묻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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